국내 최고의 빙질

아이스하키 역사

아이스하키국내도입
아이스하키가 이땅에 선보인 것은 1928년 1월2일에 일본 동경대 이스하키 팀이 만주에서 경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용산 철도국 국우회의 초청으로 서울에 들러 국우회 아이스링크에서 벌인 시범 경기였습니다. 같은 해 경성상대와 철도국이 빙구부를 창설하고 시합을 가진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경기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 뒤를 이러 경성사범에도 빙구부가 창설되었습니다.

아이스하키역동기 1930년대
1930년 1월에는 조선체육회주최 제6회 全朝鮮빙상경기대회에 빙구종목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공식경기로 되어 있습니다. 또 백구 구락부와 피겨 구락부의 스케이팅 동호인들이 빙구팀을 만들기는 했으나, 경기다운 경기는 해보지 못하고 해체되었습니다.
1930년 11월에는 조선 빙구연맹이 결성되었고, 연희전문에서도 한국인 학교로서는 처음으로 빙구부를 창설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인 팀이 기존의 일본인 팀들과 경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이미 경성상대를 비롯하여 경성사범 등의 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경성상대 예과(당시 예과란 본과에 진학하기 위한 예비과정)팀은 일본에 원정하여 전일본고교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하기도 하였으며, 1932년 1월에는 경성사범도 우승하였습니다. 또한 1930년대에는 조선아이스하키연맹, 조선학생빙상경기연맹, 조선빙구연맹 등의 여러 단체에서 은 각기 저마다의 아이스하키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조선아이스하키연맹 주최로 빙구연맹전이 처음 열린 것은 1931년 1월17일 이었습니다. 경성상대, 경성상대예과, 경성고등공업, 철도국, 경성사범 등 5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는 경성상대팀이 우승하였으며, 제2회 대회는 1932년 1월 16일부터 철도공원 연못에서 연희전문, 경성공고, 철도국, 경성제대, 경성제대예과 등의 팀들이 참가하였으나 해빙으로 중지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어서 서울 청량리 소재 경성제대예과링크에서 제3회 대회가 열렸으나 현재 3회 대회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1934년 1월5일부터 한강특설링크에서 열린 제4회 대회에서는 경성사범 졸업생으로 조직된 팀을 비롯하여 고등공고, 경성제대예과, 경성사범, 경성제대, 연희전문, 경성의전, 철도국 등 8개 팀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경성제대팀이 7전7승으로 패권을 잡았습니다.
1934년에는 세브란스의전과 평양의 광성중학팀이 창단되었으며, 1935년에는 경성의전, 1936년 보성전문, 1938년 개성 송도중학, 1939년 휘문중학이 각각 팀을 조직하였습니다.

중학부 아이스하키경기는 1938년 1월에 열린 중등빙구연맹전이 처음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2회 대회는 1939년 1월16일부터 동숭동 소재 경성제대링크에서 거행되어 경성사범이 우승했으며, 제3회 대회는 경성상업이, 1941년 제4회 대회에서는 휘문중학이 우승하였습니다.

高專部 아이스하키도 중등빙구연맹전과 함께 개최되었습니다. 제2회 대회는 보성전문, 경성공고, 경성의전,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등이 참가하여 경성의전팀이 우승했고 1940년 1월 17일 경성제대링크에서 열린 제3회 대회에서는 경성의전. 세브란스의전, 보성전문과 경성제대팀 등이 출전하여 경성제대팀이 우승하였습니다.

1939년부터 전조선빙구선수권대회가 3년간 열렸는데, 제1회 대회에서는 경성사범, 1940년 제2회 대회는 자료가 없으며, 제3회 대회에서는 순수한 한국인팀인 연희전문팀이 경성의전팀과 경성대학예과팀 등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연희전문팀은 1934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국내에서 일본인 팀들을 모두 제압하였을 뿐 아니라 연 3년간 전일본선수권대회에도 참가할 정도로 실력을 잦춘 팀이었습니다.

815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경복중, 중동중, 용산중, 배재중 등이 아이스하키팀이 결성되면서 여러 친선게임 및 리그전이 열렸습니다. 같은 해 창경원의 특설링크에서는 경.평전 아이스하키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아이스하키협회결성 및 국제연맹가입
역동의 1930년대를 거치며 국내에 다수의 빙구팀이 결성되면서 경기가 활성화 되자, 1947년에는 동호인들이 서둘러 조선아이스하키협회를 발족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초대회장에는 최선익씨가 추대 되었습니다.
협회는 1950년 11월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에 회원가입을 신청하여 이듬해 3월 총회에서 정식 가입국으로 승인받았습니다.

국내최초 실내아이스링크 건립 동대문아이스링크
한편 당시의 빙상경기시설은 아주 미비하였습니다. 1962년 이전 아이스하키는 물론이고 국내 각종 빙상스포츠는 모두 천연빙에 의존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연중 12월 하순부터 1월까지 혹한의 추위로 결빙이 되어야만 모든 연습과 경기가 가능한 원시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경기력 향상은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스하키인의 숙원이어던 실내 링크가 1964년 1월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 들어서므로써 빙상스프츠의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됨은 물론 국제적인 체면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일 아이스하키교류
1965년 1월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본대학 아이스하키팀을 초청하여 국제경기를 가졌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교환경기를 계속 개최하여, 한일친선 아이스하키대회는 1971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3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뒤, 1974년 3월 일본에서 다시 한일친선대회가 열렸습니다. 첫 경기는 3월 15일 닛코(日光)에서 열린 우리팀과 전일광선발팀인 후루가와전공팀과의 경기는 우리팀이 게임 초부터 월등한 스피드로 일광팀을 맞아 맨투맨 마크에 성공 시종 공격의 주도권을 잡아 7대1로 서전을 장식하였지만, 전일본학생 선발팀과 경기를 비롯하여 나머지 두 게임에서는 패함으로써 총 전적 4전1승3패를 기록하고 돌아왔습니다.

1975년에는 일본에 원정간 우리 팀이 전일본선수권대회 C그룹에 참가하여 우승하고 개선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내에서는 한국아이스하키 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재일동포 고한준(아시아상사 사장)을 위시한 몇몇 인사가 700여 만원을 모금하여 협회에 기금으로 전달함으로써 아이스하키계의 앞날에 밝은 전망과 의욕을 일으켜주었습니다. 그 결과 1976년에는 B그룹으로 승격되어 참가하였습니다.

1979년 아이스하키사상 첫 국제대회참가 및 활발한 국제교류
1979년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의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국가대표팀으로서의 첫 공식 국제대회이었으며, 우리는 영국팀에게만 승리하고 모두 패하여 참가 10개국 가운데 9위를 차지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많은 변화를 격었습니다. 우선 각팀 및 국가대표 선수들의 해외전지훈련, 국제대회에 지속적인 파견과 국제대회의 국내유치, 국제심판강습회에 참가 및 국내개최, 외국인 코치 강습회 개최 등 낙후된 경기력의 향상을 위한 노력들이 부단히 전개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빙상시설도 현대화되어 1984년 5월에는 태능국제 아이스링크가 개장되었고, 1989년 12월에는 완벽한 국제규모의 시설을 갖춘 목동실내 아이스링크가 건립되었습니다. 목동링크의 개장으로 1990년 2월에는 제7회 아시아,오세아니아 주니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1980년대 남북대결에서의 승리
1980년대 주요 이벤트는 남북한 아이스하키 대결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남북아이스하키의 대결은 1986년 3월4일 일본 삿뽀로에서 열린 제1회 동계아시아경기대회 때 이루어졌으며, 모두 2-1과 4-3 으로 승리하였으며, 최초의 남북대결을 승리로 이끌어, 동메달을 따내기도 하였습니다.
또 1989년 2월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는 일본팀을 맞아 경기 내용면에서 완전히 압도한 끝에 5-1로 완승하였습니다. 이는 28년간이나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아이스하키를 배웠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실로 감격스러운 승리였습니다.

1990년대 아이스하키숙원사업 아이스하키실업팀 창단
실업 아이스하키팀이 전무했던 1980년대 까지는 한국의 국가대표는 실제 국가대표가 아니라 대학대표였습니다. 한참 기량이 뛰어난 20대에 한국의 모든 선수들은 은퇴아닌 은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졸업 후 선수생명을 연장시켜줄 실업팀이 전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93년 석탑건설이 한국 아이스하키역사상 처음으로 실업팀을 창단하였고, 다음해인 1994년에는 만도기계에서 만도위니아팀이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하여 실업팀 창단의 물꼬를 트고, 이어 1997년에는 현대정유와 동원산업에서 실업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하여 대학 졸업 선수들의 선수생명을 연장시켜 주었습니다.

한국아이스하키리그 창설
1994년 협회는 한국아이스하키를 인기종목의 대열에 올려놓기 위하여 2-3개월간의 장기리그를 기획하여 발표하였으며, 국내 최초로 단위대회가 아닌 장기레이스의 한국아이스하키리그를 창설하여, 석탑건설을 포함한 대학5개팀간의 한국아이스하키리그 시범리그가 개최되어 석탑건설이 우승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석탑과 만도, 대학5개 팀의 2차리그를 통한 최후승자를 가리는 제1회 한국아이스하키리그가 열렸으며, 역시 석탑건설이 만도기계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 하였습니다.

아이스하키유래와 스텐리컵
아이스하키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어떤 전문가는 1853년 캐나다의 도시인 킹스턴과 핼리펙스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군인들이 아이스하키를 생각해 냈다고 하며, 또 일부에서는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 대학의 학생들이 처음으로 아이스하키를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스하키의 기원에 관한 주장이 엇갈려 있어도 아이스하키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몬트리얼에 살고 있던 R.F.스미스가 1870년대 말에 처음으로 아이스하키의 룰을 만들었다는데 의견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1879년 결빙된 강에서 편을 갈라 경기를 한 것이 최초였다고 하며 마침내는 캐나다의 국기로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근대 아이스하키는 당연히 캐나다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 경기가 유럽에 소개되자 곧 호응하는 나라들이 늘어났고 여러 나라에서 국제단체를 조직하자는 의견이 있어 1908년 5월 파리에서 가진 제 1회 회합에서 국제아이스하키연맹이 결성되었습니다.
이후1910년에는 유럽선수권대회를 1920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창설 국제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으며 1924년에 개최된 제 1회 동계올림픽대회에서는 아이스하키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인조 링크가 도처에 만들어 졌고 세계적으로 급격히 보급되면서 인기 있는 동계 스포츠종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현재 50여 개국이 국제 연맹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아이스하키는 북미지역과 유럽지역, 아시아지역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북미아이스하키는 캐나다, 미국이 대표되고 유럽 아이스하키는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체코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시아 아이스하키는 한국, 일본, 중국, 북한, 카자흐스탄 등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자료출처 : 대한아이스하키 협회)